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

 



안녕하세요 맹독성 리트리버입니다.

오늘은 아버지께서 추천해주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라는 책을 다 읽었습니다.

위에 소개한 '메멘토 모리'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며, 우리 모두의 삶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소설가인 이상운 작가가 아버님이 여든여덟 살이던 해에 병석에 들어 아흔 두살의 연세에 세상을 떠나실 때 까지 함께한 여로를 다룬 책입니다.

흔히 의료인들의 관심이 되는 아버님의 '질병'이 어떤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작가의 아버님이 겪었던 '죽음으로 가는 과정'과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같이 감당해내야 하는 가족의 입장이 더욱 가슴에 와닿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날들을 함께하는 이 특수한 여행에서, 흔히 생로병사라고 말하는 인간과 인생과 생명체의 보편성을 느끼고 읽으려고 애쓴다.
  물론 아버지와 나는 함께 동일한 체험을 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특수한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보편성을 맛보고 공유하게 될 것이다.`

---------

 

글을 읽으면서 우리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할머니와 고모 손에서 키워졌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할머니의 손을 많이 타고 자랐습니다.

할머니가 아프시 시작하셨던 것은 초등학교 때 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정말 정정하시던 분이었는데, 신장이 안좋아지셔서 투석을 받아야 하시더니 어느새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하고 늘 누워계셔야 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할머니의 병세는 점점악화되어서 이 책에도 잘 나와있는 '섬망'이라는 병세까지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병원에가는 게 갈수록 좀 무서웠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는 할머니는 내가 알던 할머니가 아니었고, 점점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셨습니다. 눈빛은 나를 보는 것 같지 않았고, 눈빛도 총기를 잃으셨습니다.

어렸을때 제가 할머니 병원에 가는 것을 망설였던 것은 본능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는 어린 제가 보기에도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무서웠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5학년,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저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이 너는 집에 있어라 라고 말씀하실 때에 선뜻 '나도 갈래요'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

 

의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다 보니 대부분 작가님의 감정에 공감하면서도, '이건 현실적으로 어려운데.. 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먼저 `집에서 죽음을 맞고자 하는 환자들을 종합적으로 안내해 주는 시스템` 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제가 얼마전에 소개한 일본의 경우에도 시행하고 있는 `집에서 맞이하는 죽음`과 일맥상통하는 제도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의료진이 이러한 방식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에서 '의료보험 심사 평가원'에서 인정하는 의료 방식으로 채택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문성을 가지고 어느정도 합리적인 가격으로 `집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도와드리는 역할을 하려고 해도, 사회적인 논의와 함께 먼저 심평원의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전문가와 환자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국가기관의 인정을 받아야 시행될 수 있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장기간의 입원 후 퇴원을 앞둔 아버지가 하체의 근육 퇴행으로 보행 능력을 상실한 것`을 보고 우리나라 병원 시스템에 대해 허탈한 분노를 느끼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프랑스의 병원에서는 1960년대 후반에도 고령의 환자를 위한 이러한 배려가 있었는데, 21세기 대한민국의 병원에는 왜 이런 세심한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 

죄송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문제는 돈입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의 과로가 문제입니다.

진료비는 외국 병원에 비해서 반도 안되고 그에 반해 의사 1인당 업무 강도는 외국의 두배가 넘습니다. 환자를 세심히 챙기지 못하는 것은 환자의 가족 입장에서는 분명 화나는 일이고, 저도 그러한 감정을 느꼈지만 한국 의사들이 프랑스 의사들 보다 세심하지 못하거나, 더 악해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문제는 제도와 시스템에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자는 말은 아닙니다. 의료계는 이러한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투쟁을 해나가야 합니다.

-----------

우리는 늘 죽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고 대비하는 것은 늘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보다 훨씬 이른 순간이어야 합니다.

죽음이란 것은 언제 나에게 찾아올 지 모르는 것이며, 죽음을 앞둔 순간에 나의 판단력이 온전할지 절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회피하려 합니다.

부모님께 영정사진을 찍으시는게 좋겠다고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면 좋겠냐고 말하는 것은 흔히 엄청난 불효로 생각되며, 자식된 입장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먼저 말씀을 꺼내시면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며' 만류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로 받아들여지는 듯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여,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또한 언제 나에게 닥쳐올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밤 내 머리위에 핵폭탄이 떨어져 정신을 차려보면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죽음과 인생을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온 '고도'로 비유합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고도를, 모두들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

 우리는 늘 죽음을 대비해야 합니다.

아직 의사가 되지 못한 학생에 불과한데도, 이미 수많은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분들을 뵈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저도 스스로의 죽음을 온전히 대비하지 못해왔고, 늘 미뤄오기만 한 것 같습니다.

내일 이어지는 part 2 에서는 죽음을 준비하는 실질적인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사전 의료 지향서'는 내가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을 시점에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미리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른 직업군을 가지신 분들보다 죽음을 더 가까이 접해왔던 저도 늘 미뤄만 왔던 죽음에 대한 준비를 이번 기회에 조금씩 해보려고 합니다. 저희 가족들에게도 조심스레 얘기를 꺼내보고요.

우리 모두 나의 죽음,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지 말고 직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Recent posts